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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역사 – 1960년대 한국의 자동차

대한민국은 자동차 생산량 세계 5위의 자동차 대국이 되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친 전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였던 대한민국이 이처럼 빠른 시간 안에 경제 대국, 자동차 대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그 모든 과정과 노력을 다 살필 수는 없지만 대한민국의 자동차 역사를 차례로 짚어 보는 일은 큰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첫 번째로 1960년대 이전 한국의 자동차를 살펴보았다.

농업을 근본으로 삼아 온 조선에 공업의 대표 상품인 자동차가 처음 들어온 것은 언제일까?

1901년경 미국인 버튼과 홈즈가 서울을 구경하고 쓴 여행기에 자동차와 소달구지가 함께 찍힌 사진이 실린 것으로 미루어 자동차가 서울에 들어온 것은 그 이전일 것으로 추측이 되지만 국내에 공식적으로 등록된 차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공식적으로 등록된 기록이 남아 있는 첫 차는 1903년 고종 황제가 즉위 40 주년을 기념하여 미국 공사 알렌을 통해 들여온 고종황제 어차다. 자세한 기록이 남아 있지 않아 이 차가 포드 인지 캐딜락인지 확실치 않은 가운데 포드의 오픈카일 가능성이 높다고 알려지고 있고 운전사는 일본인이었다고 한다. 이 첫 차는 1904년 러일 전쟁 중에 자취를 감추어 현재 남아 있지 않다.

그 후 1911년에 다시 황실에서 2대의 자동차를 구입했는데, 영국 다임러의 4기통 리무진은 고종 황제를 위해, 미국 캐딜락의 8기통 리무진은 순종 황태자를 위해서였다. 이후 다임러는 순종황제가 캐딜락은 순정효황후가 탔다. 이들 두 어차는 현재 국립 고궁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이즈음 국내에 등록된 자동차는 황실용 2대와 총독부용 1대, 총 3대가 전부였다. 그 후 1911년 말에 일본인 에가와가 경남에서 승합차 영업 허가를 얻고, 8인승 포드 승합차로 그 이듬해부터 영업을 시작했다. 1913년에는 일본인 오리이와 곤도가 서울에서 택시 대절업을 시작했고, 이어서 한국인 이봉래씨와 함께 오리이자동차상회를 설립해 본격적으로 운수사업이 시작됐다. 1914년에 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오리이상회는 평양-진남포, 사리원-해주, 신의주-의주, 천안-온양, 김천-상주, 공주-조치원 등 9개 노선에서 본격적인 버스 정기노선을 열었다. 이후 전국적으로 활발한 운송사업이 전개되었고 한국인으로서 처음 버스운송업체를 설립한 사람은 공주갑부 김갑순이었다.

자동차 등록대수가 늘어나고, 교통사고도 발생하기 시작하자 1915년 서울 경시청에서 자동차를 단속하기 위한 ‘자동차 취재령’이 공포되었는데, 이는 우리나라 최초의 도로교통법인 셈이다. 이 때 자동차 속도 제한은 25km/h였고, 1921년에 개정된 취재규칙에서는 40km/h로 제한되었다.

민간인으로 자가용을 가진 최초의 한국인은 3.1운동 민족대표 33인 중의 1명인 의암 손병희 선생으로 1918년 캐딜락 2대를 들여와 1대는 고종황제에게 진상하고, 1대를 자신이 탔다고 한다.

1928년에는 경성부청(현 서울시청)에서 20인승 대형버스 10대를 들여와 처음으로 서울시내 정기 노선 버스를 운영했다.

자동차 정비 업체와 부품 생산 업체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초기에는 거의 미국인이나 일본인이 운영하는 업체들이었고, 한국인이 운영한 업들은 대체로 영세했다. 정비 업체로 가장 큰 곳은 국내 정비의 60% 정도를 차지했던 경성 서비스를 들 수 있다.

일제 강점기 동안 일본은 통치 및 물자 수탈을 위해 많은 도로를 건설하였다. 1917년 국내 도로는 총 연장 4,987km, 1930년 말에는 18,910km, 해방된 1945년 8월에는 24,031km였으며, 포장도로의 비율은 4.4%에 불과했다.

1944년 12월 고 김철호 회장이 기아산업의 전신인 경성정공을 설립했다. 처음에는 자전거 부품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한국전쟁으로 부산에 피난한 기간에 국내 첫 브랜드인 3000리호 자전거를 발표했으며, 52년에 기아산업(주)으로 사명을 바뀌었다.

현대자동차공업사가 설립된 것은 해방 후인 1946년이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은 40년대 초 자동차 정비회사인 아도서비스를 시작했다가 43년 기업정리령에 의해 철수 했다가 다시 자동차산업으로 돌아왔다. 현대자동차공업사는 한 때 현대건설에 통합되었다가 67년 현대자동차(주)로 다시 태어난다.

시발

시발

1955년 9월 우리나라의 첫 국산차인 ‘시발’이 등장했다. 해방 전부터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씨 3형제가 한국전쟁이 끝난 후 서울에서 국제공업사의 문을 열었고, 불하 받은 미군용 지프의 엔진, 변속기, 섀시 위에 드럼통을 펴서 만든 바디를 얹어 지프형태의 승용차 시발을 만들었다. 그 해 10월 광복 10주년 기념 산업박람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하면서 인기가 올라가기 시작했고, 정부의 지원과 계약이 밀려들면서 1억 환 이상의 자금이 들어와 본격적인 양산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1대 만드는데 수개월이 걸려, 55년에 7대를 생산했고, 56년에는 1주일에 1대 꼴인 74대를 생산하는데 그쳤지만, 57년 새로운 공장 시스템과 인력을 확충한 후 하루 1대씩 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시발은 엔진 블록과 실린터 헤드 등 엔진 주요 부품을 포함한 많은 부품을 국산화해 국산화율이 50%를 넘었고, 60년에는 완전국산화를 달성한다는 목표를 세우기까지 했으나 실제 달성하지는 못했다.

탄력을 받은 시발자동차는 한 달에 1천대 생산이 가능한 현대적 시설을 갖추겠다는 부푼 꿈을 꾸고 구체적인 준비에 들어가지만 운영자금이 부족해지고, 사업 승인은 늦춰지던 즈음 5.16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혁명정부는 시발자동차 대신 62년 등장한 새나라 자동차에 소형자동차 부문의 힘을 실어 주었고, 새나라 자동차에 밀린 시발자동차는 63년 말 총 2,235대 생산을 기록하고 생산 중단에 들어갔고, 64년에는 문을 닫기에 이르렀다.

1955년에 김창원씨가 설립한 자동차 정비공장 신진공업사가 1957년 신진공업(주)으로 성장했는데, 이 회사가 훗날 대우의 전신이다.

새나라

새나라

1962년 등장한 새나라 자동차는 재일교포 박노정씨가 닛산과의 기술제휴로 설립한 회사다. 1,200cc급 닛산 소형차 블루버드를 ‘새나라’라는 이름으로 SKD 생산하기로 하고, 초기 완성차 400대를 들여왔고, 조립공장이 준공된 후 9월부터 조립생산을 시작했다. 62년과 63년에 각각 1천여 대씩 총 2,372대를 조립생산 한 후 외환사정 악화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손으로 철판을 두드려 만들던 시발과 달리 현대적인 생산시설에서 조립된 새나라는 큰 인기를 끌었지만 국산화율은 5%에 불과했다.

K-360

K-360

1962년 1월 기아산업은 우리나라 최초의 3륜 트럭 K-360을 출시했다. 1944년 설립된 경성정공이 52년 피난 간 부산에서 최초의 국산 자전거 3000리호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회사명을 기아산업으로 바꾸었다. 57년에 시흥공장을 준공하였고, 61년에는 자전거에 원동기를 붙어 오토바이 생산을 시작한 데 이어 자동차까지 생산한 것이다.

3륜 트럭 K-360은 356cc 공랭식 2기통 엔진을 얹고 중량 485kg, 적재량 300kg, 최고속도 65km/h의 성능을 냈다. 가격은 당시 9만 5천원이었다. 이듬해 3월에는 성능이 높아진 3륜 트럭 T-1500을 출시했는데, 배기량 1,484cc 수냉식 4기통 엔진을 얹고, 중량 1,480kg에 적재량 2톤, 가격은 12만원이었다. 하지만 두 모델 모두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신성호

신성호

63년 3월 신진공업은 생산이 중단된 새나라를 그대로 본 떠 만든 신성호를 출시했다. 이 신성호도 시발처럼 철판을 두르려 만든 차체에 1,500cc 재생 엔진과 변속기 등을 조립한 것으로 새나라보다 훨씬 비싼 가격 때문에 65년까지 총 322대를 생산하는데 그쳤다. 하지만 신성호 생산으로 기술력을 인정받아 정부의 소형자동차 공장의 실수요자로 선정되면서 발전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1964년에는 자동차공업 종합육성계획이 발표되었고, 이 계획에 따라 신진공업은 종합조립공장의 실수요자로 선정되었다.

1965년 아시아자동차공업(주)이 설립되었고, 신진공업은 새나라자동차를 인수했다.

코로나

코로나

1966년 1월 신진공업이 토요타와 기술 제휴를 맺고, 신진자동차공업(주)으로 사명을 바꿨다. 그리고 차관을 바탕으로 근대화된 조립공장을 건설해 토요타의 1,500cc급 코로나를 CKD 생산하기 시작했다. 67년에는 중형급의 크라운, 68년에는 800cc급의 퍼블리카 생산을 시작했다. 코로나는 큰 인기를 끌다가 중국이 대만과 국교를 맺고 있는 나라와의 거래에 불이익을 주겠다는 정책을 내 놓자 토요타가 신진에서 철수하면서 코로나는 1972년까지 4만 4,248대를 끝으로 생산이 중단되었다.

코티나

코티나

1946년에 설립되었던 현대자동차공업사는 1950년 현대토건사와 합병하여 현대건설(주)이 되면서 자동차사업은 부설 중기공장으로 존재하다 1967년 12월 현대모타(주)로 부활했고, 곧바로 현대자동차(주)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1968년 1월 제조업체 삼원화 방침에 따라 새롭게 자동차산업에 진입하게 된 현대자동차는 2월에 포드와 기술 및 조립, 판매계약을 맺고 현대자동차 최초 모델인 코티나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코티나는 4기통 1,598cc 엔진을 얹고 최고출력 75마력, 최고속도 160km/h의 성능을 냈다 71년 뉴 코티나로 바뀌기까지 9,290대가 생산됐다.

T-2000

T-2000

기아산업은 초기 3륜 트럭의 실패 이후 다시 3륜 트럭에 도전해 도요고교의 여러 모델을 분석 후 중형 3륜차인 T-2000을 도입했다. 1,985cc 엔진을 얹고 적재량이 2톤인 이 모델은 97년 기아마스타 T-2000으로 출시되어 큰 성공을 거두었다. 69년에는 기아마스타 T-600도 성공시키며 70년대 본젹적인 4륜차 생산의 기초를 닦게 되었다.

T-600

T-600

 

 

About 박기돈

자동차와 삶을 사랑하는 사람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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