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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역사 – 1970년대 한국의 자동차

1970년대는 대한민국이 오늘날과 같은 자동차 대국으로 성장하는데 가장 중요한 초석이 다져진 기간이었다. 정부는 자동차 산업을 국가 경제의 중요한 성장동력으로 삼은 정책을 발표했고, 당시로서는 불가능해 보일 수도 있었던 무리한 정책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실현시킨 중요한 결정들이 자동차 회사들에서 이뤄졌다. 이로써 한국 최초의 순수 국산모델 포니가 등장할 수 있었고, 기아가 승용차 생산에 가세하게 되었다.

현대 포니

현대 포니

1973년 1월 12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중화학공업정책을 선언했다. 경공업 중심의 산업구조를 중공업 중심으로 전환시키는 중요한 기틀이 만들어진 것이다. 뒤이어 1월 18일에는 자동차 공업 육성계획이 발표됐다. 이는 69년 12월 수립된 국산화 3개년 계획에 이어, 부품 국산화율을 73년 말까지 72%, 75년까지 완전 국산화하고, 80년대 초까지 완성차 생산 50만대와 1억 5천만 달러 수출을 달성한다는 계획이다. 이런 내용이 공문으로 각 자동차 회사에 전달되었을 때 당시 GM코리아 김창원 사장을 비롯한 업계 관계자들은 실현 불가능한 계획이라고 반발했지만 현대자동차 정주영 회장은 굳은 표정으로 정부 계획을 듣고 난 후 ‘포니’ 생산 계획을 제출했다고 한다.

이 계획은 이듬해인 74년 5월 확정 발표되었는데, 75년에 국산화율 95%이상, 생산가격 2천 달러 내외의 국산 신차 생산, 81년에 자동차 50만대 생산, 7만 5천대 수출 등이 그 내용이었다. 75년에 등장한 포니 뒤에는 당시 정부 주도형 산업 계획이 큰 역할을 했던 것이다.

1968년 경인, 70년 경부 고속도로에 이어 71년 12월 영동 고속도로가 신갈 ~ 새말 구간에서 개통됐다. 68년부터 포드의 기술로 코티나를 생산하던 현대자동차는 71년 뉴 코티나 생산을 시작했다.

현대 뉴 코티나 광고

현대 뉴 코티나 광고

1972년에는 전국적으로 난립하던 크고 작은 자동차 조립공장에 대해 폐쇄조치가 내려지면서 대기업 중심의 자동차산업이 자리잡게 되었다. 신진 자동차는 일본 토요타와 손잡고 코로나, 크라운, 퍼블리카 등을 생산했지만, 70년 중국의 주은래 수상이 선포한 소위 ‘주4원칙’에 따라 토요타가 72년에 한국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면서 새로운 제휴 업체로 GM을 선택하고, 6월 신진과 GM이 50:50으로 합작해 GMK(GM Korea)를 설립하였다. GMK는 GM의 유럽 자회사인 오펠과 제휴하여 1,900cc급 레코드와, 나중에 시보레 1700으로 불리게 되는 호주 홀덴의 토라나를 들여와 생산을 시작했다. 이처럼 현대는 포드, 신진은 GM과 제휴하게 되면서 당시에는 미국 자동차의 영향을 많이 받게 되었다.

시보레 1700

시보레 1700

1973년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정부 주도의 중화학공업정책과 자동차공업 육성계획이 발표된 해다. 기아는 10년간 3륜 트럭을 생산한 후 71년에 4륜 트럭을 생산하기 시작했고, 승용차 생산에 대한 기대를 가지고 73년에는 승용차에 가까운 소형 트럭 브리사 픽업을 선보였다. 하지만 이때까지 기아는 승용차 생산 허가를 받지 못하고 있었는데, 73년부터 소하리에 20만평 규모의 대규모 자동차 생산 공장 건설이 시작되었다. 74년 식목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예고 없이 소하리 공장을 방문, 시찰하게 되었는데, 바로 그 다음날 승용차 브라사에 대한 제작 승인이 나오게 되면서 승용차 제조사로서의 기아가 시작되었다.

기아 브리사

기아 브리사

1974년 10월 기아는 최초의 승용차 브리사 S-1000을 출시했다. 브리사는 일본 동양공업(현재의 마쯔다)의 파밀리아를 기본으로 초기 985cc 62마력 엔진을 얹은 소형차다. 74년에는 신진과 AMC가 50:50으로 출자한 신진지프자동차공업(주)이 출범했고, 현대는 AS부문을 분리해 현대자동차써비스(주)를 설립했다. 현대는 10월 토리노 모터쇼에 대한민국 첫 고유모델인 포니와 포니 쿠페 컨셉트카를 출품했다.

현대 포니 쿠페 컨셉트

현대 포니 쿠페 컨셉트

1975년 현대가 12월부터 국내 첫 고유모델인 포니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대한민국은 아시아에서는 일본에 이어 2번째, 세계에서는 16번째로 독자모델을 생산한 국가가 되었다. 포니는 이탈리아 쥬지아로가 디자인을 맡았으며, 후륜구동 4도어 패스트백 소형차로 4기통 1,238cc 새턴 엔진을 얹었다. 첫해 1만 726대를 판매했고, 이후 약 29만 4천대를 생산, 판매했다. 같은 해 GMK는 레코드 로얄을 선보였다

1976년 1월 26일부터 현대 포니 판매가 시작되었고, 그 해 에콰도르에 처음으로 수출됐다. 더불어 현대는 뉴 코티나 왜건과 포니 픽업을 내놓았고 기아는 군수용차를 제조하던 아시아자동차를 인수하고, 4기통 1.3리터 87마력 엔진을 얹은 브리사 K-303을 내놓았다. GMK는 판매실적이 떨어지며 경영에 어려움을 겪다 산업은행의 관리하에 들어가면서 새한자동차로 이름을 바꾸었다.

기아 브리사 K-303

기아 브리사 K-303

1977년에는 현대가 코니나 마크4, 포니 왜건, 1톤 트럭 포터, HD-1000 미니버스를 내놓았고, 기아는 브리사 II와 1.4톤 타이탄을 선보였다. 새한은 독일 오펠의 3세대 카데트를 들여와 소형차 제미니로 내놓았다.

새한 제미니

새한 제미니

1978년 대우가 산업은행이 보유한 새한자동차 지분을 인수하면서 자동차 제조업에 진입하게 되는데, 이후 1983년에 GM의 지분까지 인수하면서 새한 브랜드를 버리고 대우자동차로 새 출발하게 된다. 새한은 레코드 1900을 기반으로 한 뉴 레코드를 선보이는데, 뉴 레코드는 이후 대우자동차의 핵심 모델인 로얄 시리즈로 진화한다. 현대는 유럽 포드의 6기통 최고급차 그라나다를 도입해 생산하기 시작했다. 1,993cc로 수냉식 V6 OHC 엔진을 얹고, 최고출력 102마력, 최대토크 16.9kgm, 최고속도 165km/h를 발휘했다. 그라나다는 1985년 12월에 단종할 때까지 4,743대가 생산되었다.

현대 그라나다 V6

현대 그라나다 V6

동아자동차로 이름을 바꾸었던 허동환 자동차는 1979년 일본 닛산디젤과 기술제휴를 맺고 평택공장을 준공했다. 오늘날 쌍용자동차의 평택 공장이 어때 들어선 것이다. 1979년에는 기아가 푸조의 최고급차 604와 피아트 132를 선보였고, 현대는 포니 1400과 포니의 1.4리터 엔진을 얹은 마크4 이코노미를 선보였다.

피아트 132

피아트 132

1980년에는 국보위가 자동차 분야의 통합을 위한 투자 조정 방안을 발표했다. 그 내용은 현대와 새한을 그룹으로 묶어 승용차 생산을 전담하고, 기아는 승용차 생산을 폐지하고 5톤 미만의 소형상용차만 생산하며, 대우는 발전설비를 전담한다는 것이다. 현대는 포니 3도어, 코티나 마크5, 그라나다 4기통 모델을 내놓았고, 기아는 봉고 1톤 트럭을, 새한은 로얄시리즈를 선보였다.

현대 포니 3도어

현대 포니 3도어

About 박기돈

자동차와 삶을 사랑하는 사람 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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